리버사이드
(부제:계속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에 기댄 마음)
정밀아 정규4집 [리버사이드] :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에 기댄 마음.
정밀아의 정규4집 [리버사이드]는 거대도시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을 배경으로 한다. 한강은 흘러온 역사와 존재감만큼이나 사람들의 삶에 다채롭게 스며들어 있다. 한강의 기적, 한강 르네상스 같은 현대적 발전의 큰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는 도시의 낭만, 눈물과 좌절, 또 누군가에게는 생의 마지막 풍경일 수도 있다.
정밀아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타인과 세상을 본다. 매일 강가를 산책하며 만나는 강변의 풀과 나무,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부터 저 먼 곳, 폭탄이 터지고 매일 죽음을 목도 하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자연에 기댄 마음'을 노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는 것임을 새삼 일깨우는 듯한 강물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총10곡 중 첫 번째 트랙 [장마]는 7월의 빗소리로 시작한다. 장맛비 소리에 문득 지난 겨울의 바다를 떠올리면서도 연일 이어지는 뉴스에 걱정도 인다. 비에 잠긴 강변북로와 동네 풍경을 보다가 먼 곳에 있는 친구의 안부를 묻고 소중한 것들은 떠내려가지 말기를 바란다. 날이 밝고 무채색의 구름은 물러나고 어제의 비는 모르는 일이라는 듯 하늘이 맑아 온다.
[서술] 제목 그대로 현재의 자신을 서술한 노래이다. 새로운 곳에서 살게 되었고 변함없이 노래하는 사람이며 살뜰히 일상을 가꾼다. 사랑부터 신념까지 생각은 어디까지 펼쳐지기도 하고, 자신의 노래가 누군가에게 다정하게 내려앉기를 바란다. 1인으로서의 삶인 동시에 무수한 우주들과 연결된 삶임을 안다. 1집 수록곡 '내 방은 궁전', 3집 수록곡 '어른' 등의 곡과 결이 이어지는 곡이라 하겠다.
[리버사이드] 한강에 대한 노래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2집을 만들 때부터 시작했다. 노래의 시선은 강변을 따라가다가 다리 위에서 멈춰 선다. 신기루 같은 도시를 보니 오래전 들었던 농담,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들이 떠오르고 쓸쓸함에 그저 노을 지는 하늘 끝을 바라본다. 가사 중 '다리를 건너도 찬란한 세계 있지 않고'는 1집 수록곡 '방랑'에서 차용한 것이다. 점차 빌드업 되어 가는 후주가 무척 인상적이다. 곡의 끝에 오버랩되는 기차소리는 한강철교 아래에서 녹음했다.
[그림] 야생지대에 대해 생각했다. 훼손되고 무너져가는 자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 그대로 그냥 두는 야생지대를 가꾸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현가능성을 알 수 없으므로 아직은 그저 그림 속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구구] 2집 수록곡 '말의 이해'에 이은 말에 대한 연구이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말을 하고 듣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부디 우리, 사랑을 말할 때는 금 같은 입이 되자.
[운다] 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프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용기를 내어 그들의 울음을 보아야 한다고, 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울음을 기억해야 한다 생각했다. 전쟁의 굉음들, 난민보트위의 절규, 권리와 생존을 위한 외침들, 살아남은-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울음, 그 사이에서도 맑고 높은 아이들의 웃음들은 피어난다. 보컬 중반부터 시작되는 엠비언스와 연주는 점차 증폭되더니 마침내 절규하고 폭발한다. 앨범의 가운데를 흐르는 거대한 강물 같은 트랙이다.
[물결] 강물을 바라보며 부르는 독백이다. 검고 느리게 흐르는 강을 보니 나의 마음도 보이고, 강가의 나무, 풀꽃, 바람, 노을, 별들이 위안이 되어 마음을 기댄 날이 여럿이다. 오래전 어느 드라마에서 '훨훨 살어, 훨훨'이라는 대사를 들었다. 그 여섯 글자의 말이 큰 위로가 되어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았다. 언젠가 노래에 녹여내야지 했는데 마침내 그 말을 노래로 부르게 되었다.
[사랑은] 이제까지 발표한 곡 중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한 곡이다. 문득 사랑이 뭘까 생각한다. 온갖 빛깔과 모양의 사랑이 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좋은 것이 아주 많다. 노래 몇 개에 담아 부르기엔 사랑은 한참 더 넓고 깊다. 그러니 우리 그저 사랑하자.
[좋은 아침 배드민턴 클럽] 아침 일찍 비 그친 강변에 나갔다. 옅은 햇살과 맑은 공기 사이를 걷고 뛰는 사람들을 보니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밤을 먹고 사는 우리에게 아침의 광명은 드문 것이다. 운동은 그저 핑계여도 괜찮으니 계절 사이 한두 번쯤 느슨히 만나 서로의 안녕을 물으면서 우리들 모두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강엘레지] 마지막 트랙은 연주곡이다. 2022년9월 어느 저녁, 한강 다리 위, 추락방지를 위해 설치된 철망 앞에 누군가 매달아 둔 국화꽃 한다발을 보았다. 잠시 온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몇 달 후 여행 중에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모습을 보다가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고 애도의 마음을 보내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4월의 어느 날 한숨에 이 곡을 작곡했다. 가사는 쓰다가 결국 쓰지 않기로 했다. 때로는 구구절절 써재낀 말보다 묵언이 더 필요한 것이다.
장르적으로 정밀아의 음악은 포크Folk로 분류된다. 그의 전작 [청파소나타]는 '아주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앨범/포크음악의 존재가치를 다시금 일깨우는 빈틈없이 아름다운 음반' 등의 평을 받으며 제18회 한국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반, 올해의 포크음반, 올해의 포크노래를 수상한 바 있다.
[리버사이드]는 전작들과 비교하여 사유의 범위가 더욱 방대하고 무게가 더하다. 그러나 정밀아는 이 모든 혼란과 요동을 흡수-수렴하고 고유의 균형감을 발휘하면서 쉬운 말, 아름다운 선율로 변환한다. 문학적인 가사와 명징한 보컬, 어쿠스틱기타로 앨범 전체를 이끌고, 그 탄탄한 구조 위에서 직접 채집한 엠비언스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사운드의 현장감, 입체감이 더했다. 가사작업에서부터 고려된 시퀀스는 구조적 완성도를 높였다. 이 앨범을 청취할 때 가급적 첫 트랙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한 번에 들어보기를 권한다. 책 한권을 시작하듯, 영화 한 편을 시작하듯 말이다. 무엇보다 녹음-믹스-마스터링 전반에 변화를 주며 음반 전체에 담긴 힘 있고 밀도 높은 사운드가 두드러진다. 오랜 시간 함께한 연주자들과의 합은 더없이 좋다.
'그냥 살아내는 시간들'이 있다. 지독한 고통의 연속일 수도 있고, 무미건조한 삶의 연장이라 넋두리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을 살아내고야 마는 힘은 아주 강하고 근사한 것이다. 그러니 사실은 그냥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대가 없이 곁을 내어주는 나무 바람과 푸른 땅 풀꽃 하나에 태연히 기대면서, 훨훨 강처럼 흘러 마침내 바다와 하늘에 이르기를. 이 노래들이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정을 응원하며 함께 흐르기를 바란다.